기말고사 과제 제출을 위해 중간에 이야기가 많이 삭제되어 용두사미꼴이 되었음.
우선 단편 분량.
청소하는 여자
여자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단지 그녀의 잦은 움직임만이 그녀 주변의 정체하고 있던 공기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여자는 끊임없이 방안을 닦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방안을 기고 있었다. 금방 닦아낸 바닥위로 떨어진 몇 방울의 땀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오른팔이 그리는 부채꼴의 동선은 멈추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고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하얗고 동그란 이마는 땀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법 길고 하얀 손에는 딱지가 채 앉지 않은 크고 작은 몇 개의 긁힌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투명한 폴리쉬가 발린 손톱 끝은 폐가의 기왓장 마냥 겹겹이 들고 일어나 있었으나,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사실, 여자는 며칠 째 자지도 먹지도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쳐 잠이 들 때까지 바닥을 쓸고 걸레로 훔치고 거울을 문질러 댔다. 그리고 때때로 멈추고 또 멍해졌다.
여자는 그 날을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녹아내리듯 땀을 흘렸다. 이마에서 배어나온 땀이 눈두덩을 타고 내려 속눈썹에 와 맺혔다. 이상하게도 몇 번인가 그 날을 떠올릴 때마다 여자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체온이 올라감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여자는 조금씩 녹아서 결국 흔적도 없이 증발 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속눈썹에 맺혀있던 땀이 여자의 눈 꼬리 즈음에서 아담히 솟은 광대위로 떨어져 슬픈 궤적을 그린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의 팔은 기계적으로 바닥을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텅 비어버린 여자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오른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앙상한 손등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녀의 움직임은 머리가 잘려나간 바퀴벌레의 치열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여자는 마치 바닥의 긁힌 자국 같은 그 날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날.
여자는 신촌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다. 여자는 몇 정거장 째 주머니 속에 든 플라스틱 케이스를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뷰파인더 속의 여자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전 여자는 뷰파인더 속의 여자를 처음 만났다. 사진 속 여자는 렌즈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얼마의 물기가 어려 있어 붉어진 코끝을 설명하고 있었다. 50컷이 조금 안 되는 사진 중에 그녀의 사진은 단 한 장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온통 식물들이었다. 연꽃사진이 몇 장, 마른 꽃 사진이 몇 장, 유리컵에 담긴 꽃, 바닥에 낮게 깔린 어린 풀 사이에 흩어진 작은 꽃,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처럼 화면 가득 꽃의 암술과 수술이 가득한 접사까지.
‘저 여자는 언제부터 저 꽃들 틈에서 울고 있었던 걸까. 왜. 왜 저런 얼굴을 하고.’
궁금한 마음으로 버튼을 눌러 Exif 정보를 확인 해 보니 여자의 사진만 약 2년 전쯤의 것이고 나머지들은 근래 몇 개월 사이에 약간의 날짜 간격을 두고 찍힌 것 들이었다. 다이얼을 몇 번 돌리자 꽃 사진들이 끝나고 다시 화면에 여자의 눈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을 바라봤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슬롯에서 미처 뽑지 않은 메모리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어설픈 남자 덕에 공짜로 메모리 카드를 얻었다는 생각 정도였다. 그러나 사진 속 여자와 마주친 뒤부터 자꾸 뷰파인더 속 여자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여자는 핸드폰 통화기록을 뒤져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에게서 보기 힘든 과감함이었다. 몇 번의 대기음이 반복되고 나서 수화기 너머의 남자의 인기척이 들렸다.
“저, 며칠 전에 거래한 사람인데요.”
“아, 아, 예에.”
여자가 먼저 자신을 어색하게 소개하자 남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머뭇거렸다. 확실히 과감한 쪽은 여자였다.
“메모리 카드는 옵션에 없었던 거 같아서 말이죠. ”
남자는 흔한 호의를 베풀었다.
“아아. 그거 좋은 거 아닌데, 그냥 쓰세요.”
그런데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는 여자가, 여자가 왠지 조금 더 부탁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녜요, 안에 사진 봤는데 중요한 사진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음. 그런가요?”
“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되묻는 사람은 남자였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뷰파인더 속의 여자를 떠올리며 고쳐 말했다.
“아니, 네. 그래요. 중요한 사진 이예요.”
‘끼익-’
‘딸각’ 해야 하는 전화기가 ‘끼익-’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끊겼다. 순간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요란한 클락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버스기사의 거친 욕설이 따라 붙는다. 버스는 서강대학교 앞 정류장부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여자에게 버스는 꽤 오랜만이었다. 엊그제 3년 동안 몰던 중형 승용차를 팔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만 꽤 많은 것들을 정리했다. 직장근처의 살던 집을 내어 놓고 조금 떨어진 동네에 단기간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집을 옮기면서 쓸 만 한 가전제품이나 가구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팔아 경비에 보태기로 했다.
기르던 고양이는 얼마 전에 독립한 후배에게 주었다. 그 후배는 천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 했다. 후배는 여자를 만날 때 마다 가족처럼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또 그때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꼭 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 했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 가끔 쇳소리 같던 후배의 숨소리를 떠올리며 어쩌면 고양이는 얼마 후에 또 다른 집으로 옮겨질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고양이는 낯선 환경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여자가 지난 남자에게 고양이를 선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고양이는 남자의 집에서 여자의 집으로 옮겨지고 거의 일주일 이 지나도록 책상아래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틀 정도 더 지나서 고양이와 여자는 사이좋게 공간을 나눠쓰게 되었다. 여자의 공간과 고양이의 그것이 확실히 나뉘어 졌을 즈음 여자는 고양이의 행동이 고양이만의 적응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여자는 무심한 성격의 고양이가 좋았고 고양이도 무심한 성격의 여자가 마음에 드는 듯 했다. 그런 쪽에서는 꽤 잘 맞는 주인과 애완동물 사이였다. 어쨌거나 이제 고양이의 거처는 여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이미 30인치짜리 캐리어의 절반 이상을 채워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버스 안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주말의 신촌이 그렇지 뭐.’ 하는 얼굴들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고는 창 밖 먼 곳으로 시선을 떼어 두려 노력했다.
얼마 후, 신촌로터리 쯤에서 차는 거의 멈춰 있었다.
그 틈을 타 여자는 메모리카드의 주인을 떠올렸다. 며칠 전 미놀타 바디를 들고 나왔던 이십대 후반의 남자. 전화목소리와는 많이 다른 생김새의 그 남자는 여자에게 바디를 넘기고는 ‘천천히 확인해 보세요.’ 라고 하고 한 발 물러섰다.
“뭐, 게시물에 써놓으신 대로겠죠.”
여자는 말과는 다르게 익숙한 동선으로 꼼꼼하게 바디를 살펴봤다.
“마운트 해봐도 되죠?”
“네?”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끝을 올려 대답했다.
여자는 가져온 렌즈를 꺼내어 마운트 하고는 이리저리 LCD의 수치를 보며 이것저것 만지더니 셔터를 눌러댔다. 남자는 구경하듯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뭔가 남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놀타 다이낙스 7D, 35000컷. 이 정도면 웬만큼 찍어본 사람일 텐데 왜...’
라고 생각하고 몇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가 입을 나서기 직전, 여자는 알고 지내는 선배의 D80을 떠올렸다. D80은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보급기 임에도 불구하고 중급기에 버금가는 스펙을 가져 ‘하극상’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기종이다. 그러나 무상 수리기간이 지나도록 컷 수를 3000도 아직 못 채운, 비운의 D80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하려던 말을 얼른 삼켰다.
남자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동안에 여자는 카메라를 보다가 슬롯에 꽂힌 메모리를 보는 순간 확실히 어설프다고 결론지었다.
‘거래도 제법 해봤을 텐데, 메모리를 안 챙기다니 정신없이 바쁜 건지 그냥 원래 어설픈 건지.’
하고 혀를 차는 순간 ‘쯧-’ 하는 소리가 ‘삐익-’ 하는 부저 소리에 묻혀버렸다.
여자는 버스에서 내려 어설픈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된 3번 출구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그 즈음의 신촌은 늘 그렇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자는 새삼 신촌역 3번 출구는 대표적인 약속 장소임을 실감했다. 여자는 출구에서 빠져나와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맥도날드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시였다. 어설픈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수신대기음조차 어설프게 울리고 있다.
“지금 내렸어요. 3번 출구죠? 벌써 와계세요? 예, 그리로 나갈게요.”
뭘 해도 어설프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나타나야 할 남자는 얼마가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아, 어설픈 남자는 신촌역 3번 출구도 제대로 못 찾는 건가?’
그 때 마침 눈치 빠른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역시나 어설프게.
“어디세요?”
“‘저, 3번 출구요. 꽃 파는 노점 앞에요.”
여자는 이제 이 어설픔에게 슬쩍 짜증이 나려고 했다.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순간 저쪽에서 여자를 향해 다가오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낯선 얼굴의 남자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제가 좀 늦었죠?"
여자는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손을 내민 낯선 남자는 하얀 티셔츠와 물이 적당히 빠진 청바지, 어깨에 멘 카메라가 산뜻하게 딱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남자가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았다 놓고 남자의 얼굴에서 어설픔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남자가 여자의 표정을 읽고 재빠르게 설명했다.
“원래 거래하기로 한 그 날 제가 갑자기 좀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 친구에게 거래를 부탁했어요. 그 날 그 친구는 아는 동생인데 급하게 부탁하다보니까, 제가 미처 확인을 못해서 메모리가 딸려 갔나 봐요. 좋은 거 아니라서 그거 그냥 가지셔도 되는 건데. 주말에 시간 내서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준비한 듯 쏟아져 나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그저
‘아- 네, 아- 네에, 아-.’
하고 대답하면서도 왠지
‘좋은 거 아니라서….’
라고 말하던 남자의 입모양을 곱씹어 떠올리고 있었다.
그 때 한 무리의 대학생이 남자와 여자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여자는 휘청거렸다. 남자는 여자를 부축하는 시늉을 하고 꽤 반가운 제안을 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맥주한잔 살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남의 광장 분위기 탓일까, 딱 떨어지는 남자의 차림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어설프지 않은 남자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남자와 가볍게 어깨를 스치며 만남의 광장을 빠져 나갔다.
두 개의 병이 ‘달그락’ 하고 목을 부딪치며 어색한 남녀 앞에 놓였다. 그는 하이네켄 다크, 여자는 하이네켄 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잔 위로 볼록하게 솟은 두 개의 거품이 가라앉는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남자였다.
“하이네켄 좋아해요?”
“스무 살 전엔 몰랐는데, 스물 한 살 부터는 맛있더라구요.”
“그래요?”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다시 남자와 여자는 컵 위로 올라온 두덩이의 거품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번은 여자차례였다.
“하이네켄 다크, 그거 텁텁하지 않아요?”
“글쎄요, 그냥 그런대로 괜찮은데요?”
“하이네켄 다크랑 하이네켄이랑 1:2로 섞어 마셔봤어요?”
“아뇨. 맛있어요?”
“네. 무척.”
여자는 거품이 쫙 가라앉은 잔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 남은 양을 봤다. 남자 쪽에 허락을 받는 시선을 건넸다. 남자도 ‘뭐 좋을 대로.’ 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남자와 여자는 섞은 하이네켄을 나눠 마시고 몇 병의 맥주를 더 비웠다. 재떨이에 남자의 담배꽁초가 늘어갈수록, 여자의 얼굴이 빨개질수록 남자와 여자 사이의 공기는 말캉해 졌다. 그리고 기억도 못 할, 기억할 만큼 중요하지 않은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취미가 뭐예요?”
“취미? 취미 없는데?”
“에이, 취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뭐든 말해 봐요.”
“음…. 청소.”
“청소? 남자와 청소라…? 하하, 청소가 취미로서 가지는 장점이 있나요?”
“글쎄요, 그냥 청소하다보면 아무 생각 안 나던데. 아무생각 안할 수 있어서 좋아요.”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말캉해 질수록 남자의 목소리가 더 멀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듀크 앨링턴 이네요.”
“네?”
남자가 여자의 귀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듀크 앨링턴 좋아해요?”
“그게 뭔데요?”
“지금 나오는 거요.”
“네?”
여자주변의 공기는 남자 주변의 공기보다 더 밀도가 높은 듯 했다. 남자는 여자의 귀에 대고 듀크 앨링턴을 설명하려다가 빨개진 여자의 귀에 입 맞췄다. 여자가 웃었다. 아니, 웃었던 것 같다.
남자와 여자는 몇 군데의 모텔에 들른 후에야 구석 골목에 있는 모텔의 좁은 방에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여자의 귀는 여전히 수박의 속살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남자는 아라키의 사진 속에 수박을 먹고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여자의 귀가 묘하게 섹시하게 느껴졌다. 다시 귀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여자는 그의 시작이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여자도 남자와의 키스 후, 약간의 담배 맛과 수박의 상쾌하면서도 약간 비린 맛을 떠올렸다. 남자가 다시 귀에 입을 맞추자 여자의 귀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여자의 온몸이 잘 익은 수박처럼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남자는 여자의 소리가 마음에 들었고, 그 소리는 남자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몇 번이고 절정을 느꼈다. 그 순간만은 마치 하나의 심장소리를 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낯선 남녀 사이에 서 느낄 수 없을 법한 친밀한 기분이 드는 만족스런 섹스였다. 남자는 미식가처럼 마지막 까지 여자의 몸 구석구석을 맛보고 여자의 까만 발톱에 쪽 소리를 내며 섬세하게 마무리 했다.
하나로 뒤엉켰던 그들이 두 사람이 되어 어색하게 모텔에서 빠져나오자 마치 미리 정한 것처럼 인사를 나눴다.
“반가웠어요.”
“네, 잘 들어가세요.”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이 알몸 일 때 보다 더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일요일 늦게 낯선 방에서 잠을 깼다. 금방 이사를 온 건지, 곧 갈 건지 모를 상자들이 방 구석구석에 쌓여있었다. 여자는 상자들을 보고나서야 낯선 방이 여자가 옮겨온 게스트 하우스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텁텁한 입안에 차가운 물을 부으며 생각했다.
‘수박 맛….’
남자의 맛이 묘하다고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찾아 켰다.
‘오전 3시 15분. 잘 들어갔죠? 010-XXXX-XXXX.’
여자는 액정에 얼마간 눈길을 주다가 미적지근해진 입안의 물을 삼키면서 삭제를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문자가 부자연스러운 목 넘김과 함께 사라졌다.
핸드폰을 머리맡에 던져두고 낯선 방안에 누웠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생각보다 오래 잠이 든 것 같았다. 어느새 어둠은 방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여자는 낮게 깔리는 어둠속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길 쪽으로 난 창의 블라인드 틈새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새어 들어온다. 불빛이 깜빡거리며 천장에 반원을 그리다 사라졌다. 때로 불빛은 하나였다가 두 개로 갈리기도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달리던 불빛들이 다정하게 짝을 지어 춤추기도 했다. 깜빡 깜빡 거리는 불빛들은 제멋대로 여자의 방 천장을 휘젓다가 결국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마치 의식을 행하는 듯 천천히 몸 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옅게 남은 방안의 불빛에 간단히 옷매무새를 만지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큰길가의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마침 160번 버스가 여자 앞에 와 섰다. 여자는 160번 버스에 올라탔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에 줄줄이 이어진 자동차 빨간 꽁무니를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다음정류장이 광화문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여자는 광화문에서 내려 종로 3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요일의 광화문은 꽤 한산한 편이었다. 아직 눅눅하고 미적지근한 9월의 밤공기가 싫지 않았다.
여자는 땀이 조금 나고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걸었다. 종로 3가로 다가 갈수록 꽤 한산하던 보도가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젊은 연인들과 여고1,2학년 정도로 보이는 교복차림의 여자아이 떼, 짙은 화장에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 낯선 차림의 외국인들, 잘 차려입은 정장의 노신사,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남녀들. 종로3가는 제각기 독특한 모습의 다양한 사람들로 붐볐다.
여자는 오가는 사람들에 휩쓸리듯 섞여 걸었지만 스스로가 이물질처럼 겉돌고 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자는 사람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사실 여자에게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광화문이나 종로3가에 갈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여자는 순간 나른해졌다. 마치 몸이 쪼그라들어 먼지처럼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옆구리에서 찌르르 하는 느낌과 함께 여자는 현실로 끌어당겨졌다. 남자의 문자였다.
‘어디예요?’
남자의 짧은 문자에 여자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다 답장 버튼을 눌렀다.
‘종3.’
‘나도 종3인데, 볼래요? 지오다노 앞.’
‘종3이라니, 서울 참 좁다.’
여자는 남자의 문자를 보고 아주 조금 망설였으나 곧 횡단보도 앞에 섰다.
지오다노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건널목을 건너려는 사람들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뒤섞여 있지만 분명히 구분이 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여자는 건널목 저쪽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는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올 때 까지 기다렸다.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를 하고 근처의 P커피전문점에 들어갔다.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꾸며진 깔끔한 이 커피전문점의 4층은 흡연 층이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길을 지나는 사람이 눈에 적당히 들어올 정도로 높아 창 아래로 시선을 내려두기 좋았다. 남자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남자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사이에 담배를 끼고 같은 손으로 잔을 쥔 채 간간히 커피를 마셨다. 그의 입과 코에서 영혼처럼 흰 연기가 빠져나왔다. 여자는 남자의 옆모습을 지켜보다 언젠가 지난 남자의 말이 떠올라 물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커피를 마시면 커피가 더 맛있다면서요?”
“음? 음, 담배 안 피워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남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테이블위의 담배를 들어 뜯어진 입구를 여자 쪽으로 향하며 권했다.
“아뇨, 됐어요. 궁금해서.”
여자는 거절했고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담배가 세 개쯤 구겨져 박히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마치 이미 정해진 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직은 어색한 간격을 유지하며 근처 모텔로 향했다.
이번에도 시작은 귀였다. 그는 여자의 귀를 부드럽게 핥았다. 여자가 몸을 비틀면서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조금 더 과감해 졌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보다 몸이 더욱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남자의 키스는 수박 맛이 났다. 남자는 처음보다 더 정성스럽게 여자의 몸 구석구석에 수박 냄새를 남겼다. 겨우 두 번째 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몸을 익숙하게 열기 시작했다. 남자의 성실하기 까지 한 키스는 남자를 곧 여자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여자의 공간은 촉촉하고 따뜻했다. 남자는 부드럽게 그녀의 공간을 드나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방안이 두 사람의 소리만으로 빈틈없이 꽉 찰 때 까지 서로의 몸을 가졌다. 남자가 아직 뜨거운 여자의 몸 위에 포개었을 때 가슴께에서 빠르게 박동하던 두 개의 심장은 녹아 붙은 듯 하나처럼 뛰었다.
남자가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하자 여자가 남자의 등을 감싼 손을 몸 쪽으로 당겼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줘.”
남자는 나른해져 온몸에 힘을 빼고 여자의 몸에 자신을 뉘였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자의 눈가에 아직 가시지 않은 옅은 분홍기와 물기가 남아있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여자의 헝크러진 머리를 빗기며 물었다.
“좋았어?”
“응. 넌?”
“응, 나도 좋았어. 많이.”
두 번의 섹스 후, 남자와 여자의 말은 두 사람의 몸만큼 빠르게 가까워져 있었다.
여자가 무거운 듯 몸을 비틀자 남자는 여자 옆에 누웠다. 여자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여 모로 누웠다. 나른함에 눈을 감았던 남자가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여자 몸의 탐구한다. 동그란 어깨에서 크지 않지만 탄력 있는 가슴. 그리고 남자가 특히 마음에 든 가는 허리와 탐스러운 엉덩이. 남자는 나른함도 잊은 채 여자의 몸 구석구석에 코를 가져다 대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묻어놓은 뼈를 찾는 개처럼 낯선 여자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남긴 자신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이. 여자는 아직 낯선 남자의 시선에 다리를 오므렸다. 남자는 여자의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싫어.”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더욱 다리에 힘을 줬다. 그러나 곧 남자의 완력에 의해 완전히 벌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붉은 부분에 코를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여자는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과일을 먹듯 여자의 그 곳을 음미하며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남자의 탐구가 끝난 뒤 남자와 여자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었다.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물어봐.”
“지금까지 가장 흥분된 섹스는 어떤 거였어?”
“음….”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곧 대답한다.
“2대1?”
“여자 둘, 그리고 당신?”
“응, 걔들은 레즈비언이었는데. 아니 바이섹슈얼인가.”
남자가 덧붙였지만 남자의 말이 한줄기 소음처럼 여자의 귓바퀴를 훑고 지난다. 여자가 잠자코 있자 남자가 물었다.
“그럼 넌?”
“음, 처음 했을 때?”
“처음? 어땠는데?”
“학교 선배였는데, 대학교 2학년? 엠티 갔을 때였나. 술 마시다 잠이 들었나.”
여자가 잠깐 멈추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마치 애써 기억하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잠시 졸다 깨보니 방이었는데. 선배가 내 위에 있었어. 그게 처음이야. 내 입을 막고 했어.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내가 소리를 질렀거든.”
“그게 제일 흥분되는 경험이야?”
“응, 뭐랄까. 꼭 강간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만큼 나를 원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여자의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남자의 머리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섹스를 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남자와 여자는 꽤 자주 만났다. 그러나 편리하게도 각자의 일상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단지 ‘서로를 만난다.’ 는 일이 하나 더 추가 되었을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세 번째 만남부터 그 이후는 모두 비슷했다. 약속을 하고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나 맥주를 마시고 모텔로 가서 서로가 만족할 때 까지 섹스를 하고 헤어졌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모든 것이 비슷했다. 심지어 섹스도 비슷했다. 언제나 남자의 시작은 귀였고, 여자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남자와의 섹스에 대한 만족도 비슷했다.
그 동안 둘 사이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자는 키스 뿐 만 아니라 남자의 몸 전체에서 옅은 담배연기와 수박 냄새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고, 서로에게 조금 더 편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가끔 섹스 후에 곯아 떨어져서 아주 깊고도 편안한 잠을 자는 것 정도였다.
언젠가 남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길 한가운데서 싸우는 연인을 보게 되었다. 신호에 걸려 본의 아니게 그들의 싸움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여자는 두 연인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다 문득 남자와의 관계의 편리함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날 때 까지 문자나 전화를 주고 받지 않아도 되고, 그가 누굴 만났는지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누구와 잤는지도 관심 없고, 기념일 따위를 챙길 필요가 없다. 없는 시간을 내서 만날 필요도, 상대의 기분에 맞춰서 행동해야 할 필요도 더더욱 없다. 심지어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 남자에게 사랑 받으려고 노력 하지 않아도 된다. 여자는 생각 끝에 지금의 ‘관계’ 가 여자가 해왔던 지난 연애들 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 내렸다.
집에 도착해보니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있는 네모난 상자들 틈에 커다란 캐리어가 요철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남자를 만나는 동안에도 여자는 꾸준히 30인치짜리 캐리어를 채워가고 있었다. 여자는 이삿짐 상자를 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단지 캐리어에 넣을 옷 몇 개, 운동화 따위를 꺼냈을 뿐이었다.
여자는 방 한 가운데 캐리어를 열어두고 앉았다가 문득 남자에게 떠난 다는 말도, 떠나는 이유도 설명해야할 필요도 없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여자는 예정된 날짜에 맞춰 떠나면 그만이다. 남겨질 그는 뭐, 고양이처럼 알아서 잘 살아 갈 것이다. 사실 여자는 여자가 떠나도 그가 남겨졌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 낯선 방안을 한 바퀴 돌다 휑한 벽에 어울리지 않게 걸린 커다란 은행 달력 앞에 섰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 하면서부터 들어두었던 적금을 찾은 날 받은 달력이었다. 며칠 전 은행에 들러 적금을 찾으려 했다. 해약신청을 하자 가슴에 ‘대리’ 라고 쓰인 이름표를 단 여자 직원이 익숙함에서 비롯된 속도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물었다.
“미혼이시죠? 시집가시나 봐요?”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더 물어올 것이 귀찮게 여겨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직원도 더 묻지는 않고 자리에서 ‘지익- 지익-’ 하는 기계 소음 몇 번, ‘쿵쿵’ 하고 도장 찍는 소리를 몇 번 내고는 숫자가 꽤 길게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여자는 직원이 건넨 종이 조각 위에 ‘해지’ 라는 글자에 눈길이 머물렀다. 여자가 건네받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고 일어나자 상상력이 좋은 직원은 여자의 뒤통수에 인사를 하며 덧붙였다.
“고객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결혼.
여자도 결혼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 보통의 남자를 만나 보통의 방식으로 식을 올리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는 것. 한 때는 그것이 여자가 꿈꾸던 행복한 미래였던 적도 있었다. 지난 남자와의 기억은 그랬다. 여자는 그의 여자로 살며 그의 아이를 낳고 대단하진 않아도 행복하게,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들어와 하얀 달력 종이가 펄럭거린다. 여자는 창을 그대로 열어둔 채 제멋대로 날리는 달력을 잡고 두어 장 넘겼다. 낯익은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마지막 순간처럼 눈을 감았다.
창밖에 달리던 차들도 일제히 침묵하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아득한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았을 태아 적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잉태된 것만 같았다. 여자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배아로, 배아에서 다시 몇 개의 세포덩어리로, 세포덩어리에서 수정란으로. 결국 작은 점으로 변해 사라질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그때, 여자를 세상으로 밀어 낸 것은 바닥에 두었던 핸드폰의 요란한 몸짓이었다. 기계의 얼굴엔 익숙한 숫자의 조합이 찍힌다. 남자의 숫자들이었다.
남자의 낮은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방안에 스며들었다. 얼마 후, 딸깍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오른 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있으나 마나 해 보이는 작은 창문을 젖혀 열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 캔을 따서 마시면서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남자가 담배 두 개비를 피우는 동안 여자는 침대위에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은 모텔 방 천장의 거울 같은 장식 속에 비친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얼굴처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적도 근처쯤에나 있을법한 이상한 과일을 보는 사람처럼 검고 매끈한 표면에 비치는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여전히 천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여자 쪽을 향해 말했다.
“주중에 출장 가.”
“그래?”
“응.”
“어디로?”
“상해.”
“응. 잘 다녀와.”
“응, 고마워. 한 동안 연락 안 될 거야. 돌아와서 연락 할 게.”
“응.”
여자는 잊혀진지 오래인 옛 사람의 청첩장을 받은 표정으로 대답 했다.
두 사람은 모텔을 빠져나와 나란히 걸었다. 여자의 갈색 머리가 뺨을 스치며 휘날렸다. 남자는 겉옷의 옷깃을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10월 중순의 때 이른 찬바람이 두 개의 그림자를 하나로 이어놓았다. 여자는 꽤 오랜만에 계절을 느꼈다. 얼굴 만 한 플라타너스 잎이 바닥에 뒹구는 10월의 거리. 두 사람은 날리는 머리칼 속에서 찡그린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봤다. 웃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 이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마침 남자의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버스를 등지고 서서 여자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 그가 가야할 때임을 알렸다.
“가는 거 보고 갈께.”
낯설고도 익숙한 입모양 이었다.
지난 사람과의 기억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모습이면서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는 처음 나오는 말 같았다. 여자의 버스가 늘 정류장에 먼저 도착하는 까닭도 있었겠지만 몇 번인가 여자는 남자의 말을 가로 막았던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정류장에서 여자의 버스를 기다렸다. 그녀가 버스에 오르자 남자는 담배하나를 빼 물고 자신의 구두를 한 번 내려다 본 뒤 여자의 시선에서 빗겨났다.
여자는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남자의 입모양을 떠올렸다.
남자의 입. 담배를 문 그의 입술의 모양과 수박 맛이 나던 키스. 그리고 여자의 그 곳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
바닥을 구르는 플라타너스 잎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속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남자의 얼굴이, 남자의 입술이 웃고 있었다. 순간 여자는 멈춰 섰다. 그러나 곧 여자의 발소리가 다시 차가운 보도블록 위로 선명하게 찍히기 시작했다. 거리를 뒹굴던 플라타너스 잎이 여자의 발길에 비명을 지르며 바스라진다. 그녀의 선명한 발소리가 이어진 길을 따라 이지러진 플라타너스의 얼굴이 가득했다.
남자의 출장 동안 여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딱히 집안에서 따로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안에 있는 것이 따분하지도 않았다. 다만 짐을 꾸리는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커다란 캐리어가 방안 한 가운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제 캐리어가 제법 차서 이동을 한다거나 여닫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는 캐리어를 열어 두기로 했다. 삼각대를 손질해 캐리어에 넣고 카메라를 손에 쥐어본다. 카메라의 그립부를 손으로 감아쥐고 셔터위에 검지를 올렸다. 렌즈를 돌려 창을 눈앞에 끌어다 놓았다. 고무로 감싸진 셔터가 익숙해져 달궈진 냄비처럼 손가락에 와 붙는 거 같았다. 셔터를 지그시 눌러 초점을 맞췄다. 창에 맺힌 물기가 선명해졌다. 여자는 처음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을 때 만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때의 그녀처럼 끝내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여자는 창을 톡톡 하고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에 붙어 섰다. 거리를 뒹굴던 플라타너스가 종적을 감추고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다. 여자는 창틈으로 스미는 한기에 자연스레 팔을 엇갈리고 잔뜩 움츠렸다. 그리고 마침 생각난 듯 여태 풀지 않았던 박스 안에서 검은 캐시미어 가디건을 하나 꺼냈다. 가디건을 걸치고 나서 다시 창가에 섰다. 입김이 뽀얗게 서렸다. 새 계절임을 느꼈다. 미처 넘기지 못한 지난달이 벽에 걸려있다. 눈에 익숙한 날짜가 먼저 들어온다. 왠지 저 날은 다른 활자보다 크게 인쇄된 것만 같다고 느껴졌다.
‘잘 지냈어?’
남자는 달력의 활자의 크기를 일정하게 만들며 등장했다.
‘응.’
‘시간 있어?’
‘응, 어디?’
‘명동? 영화한편 볼까?’
뜻밖의 장소, 뜻밖의 제안이었다.
명동.
여자는 입었던 가디건 위에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263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가도로를 타고 명동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가 버스에 타서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좌석 몇 개가 비어있었는데 서울역이 보일 때 즈음엔 버스가 만원이 되었다. 겨울옷 냄새, 버스 난방기의 냄새, 사람들의 몸에서 묻어나는 꿉꿉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겨울비 냄새가 여자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이는 오심에 억지로 눈을 감고 참아보려 애썼다. 명동, 약속장소에 서 있을 그를 생각했다. 가을날의 그가 그 곳에 서 있다. 곧 그의 주변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로 메워진다. 노점상의 불 빛,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외국인들의 목소리, 중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 남자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여자의 시선에서 남자는 사라졌다. 여자는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다.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신물이 올라오려는 것 같아 급하게 벨을 눌러 내렸다. 여자는 가로수를 붙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들과 덜 부딪히는 쪽을 찾아 걸었다. 그러나 명동의 그 곳. 약속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머리가 농도구배를 이루는 것처럼 늘어났다.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고 여자는 점점 더 부딪혔다. 결국 여자는 상가 앞으로 난 좁은 공간을 통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행인들과의 충돌을 피했다.
영화시간이 10분 정도 남아있을 때 여자는 가까스로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남자는 말쑥한 정장차림이었다. 니트로 된 타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마침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었고 그래서 오늘에서야 연락을 하게 되었다는 말, 그리고 잘 지냈냐는 말. 에스컬레이터에서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앞선 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연인이라면 투정어린 입모양이라도 해보였을 텐데.’ 라고 잠시 생각하다 그의 입모양을 바라봤다. 플라타너스가 지던 날 밤의 그의 모습이, 조금 피곤기 어린 듯 한 그의 얼굴에 와 겹쳐지는 것도 같다.
영화는 ‘once’ 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연인으로 보이는 듯 한 남녀의 대화에서 언뜻 상을 많이 받은 영화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기타를 연주하는 가난한 청소기 수리공남자와 애가 있고 남편이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영화는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도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여자는 두 사람이 사랑했다고 믿고 싶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자 썰물이 빠져나간 개펄처럼 텅 빈 명동을 보게 되었다. 밤 11시. 그리 늦은 시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고 있고 있었다.
“영화 어땠어?”
“음, 그냥. 좋았어.“
“응, 괜찮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피?”
남자와 여자는 P커피전문점 1층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언젠가 빨간색과 검정색으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다고 남자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여자는 화려한 명동의 초라한 일몰을 봤다. 남자가 반쯤 비워진 여자의 커피 잔 옆에 작은 종이가방을 놓았다.
“출장 갔다가 생각나서.”
“응?”
“열어봐.”
파스텔 톤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종이가방 속에서 중국풍의 팥 앙금색 자수지갑이 나온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했다. 남자는 여자의 짧은 인사에 눈치를 살피다 이내 여자가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두 사람이 정류장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막차를 기다리는 한 무리만 남겨진 듯 했다. 정류장에 263번이 도착하고 여자는 먼저 버스에 올랐다. 창밖에 남겨진 남자가 지난 가을 밤처럼 ‘연락해.’ 하는 입모양을 지어 보였다. 여자는 다른 연인들처럼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여자는 곧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묘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잰 걸음으로 익숙해진 공간에 몸을 뉘었다. 불 꺼진 방안에 창밖의 노란 불빛을 따라 쌓아놓은 상자의 실루엣이 흐른다. 네모난 상자들 사이에 옷이 삐죽 튀어나온 상자하나가 보였다. 입고 있던 옷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바람을 쐰 탓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이 몰려왔다. 눈을 감자 곧 몸이 빳빳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온 몸의 구석구석이 뻣뻣해져 심장도 곧 멈출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 덜컹거리던 심장도 곧 고요해지고 모든 것이 아득해지며 부유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여자의 몸은 바닥으로 끌려들어갔다. 여자는 앙금처럼 한없이 침전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여자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난 곳으로부터 깜빡 깜빡 작은 불빛이 여자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불빛이 커지며 여자의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알 수 없는 소음이 기적 소리처럼 번쩍이던 빛을 따라와 귓바퀴 근처를 달렸다.
‘잘 들어갔어?’
깜짝 놀라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애써 침착하게 답장 버튼을 누르다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핸드폰을 던지고 다시 침대위로 쓰러졌다.
아침 늦게 눈을 떴다. 차가운 방안 공기가 근육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마른기침을 했다.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았다. 캐리어에서 꺼낸 약 몇 알을 억지로 삼키고 자리에 누웠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침대시트를 덮고 있자니 곧 머리꼭지로부터 쏟아지듯 잠이 몰려왔다. 여자는 버티지 않고 기다린 듯 잠에 빠져들었다.
여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여자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지금이 저녁인지 새벽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남자의 문자가 몇 통 더 와 있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지만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드르르륵’
여자가 작은 가방에 여권과 티켓을 챙겨 넣고 있을 때, 핸드폰 울렸다. 여자는 받고 싶지 않았다. 왜 연락을 받지 않는지 물을 그와 그 것을 설명해야 되는 상황. 그 모든 것이 여자는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처음 느껴지는 아쉬움 같은 감정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남자의 연락을 잦아졌다. 자꾸 걸려오는 연락도 안 받으면 그만 두겠거니 생각했는데 남자는 꽤 오래 그리고 자주 연락해 왔다.
방 한가운데 펼쳐 두었던 캐리어를 닫았다. 자물쇠를 잠그고 번호 키를 돌려 잠갔다. 여자는 가득 찬 30인치 캐리어를 끌어 보았다. 캐리어를 준비하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챙겨야 할 짐이 늘었다. 얼마간 몸살로 앓아누웠던 탓인지 여자의 손이 더욱 앙상하게 느껴졌다. 손잡이를 꽉 쥔 손에 힘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여자는 조금 버겁게 느껴졌지만 곧 적응 될 것이라 생각했다. 캐리어 옆에 카메라 가방과 손가방을 두었다. 리무진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 10시. 인천국제공항. 13번 게이트.
‘만나, 이야기 좀 해.’
어김없이 남자의 문자였다. 여자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때 긴 진동소음이 들렸다.
“왜 그래?”
“어,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남자의 행동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자는 ‘설명’ 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 짧고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만 연락하자. 나 내일 떠나.”
“이게 뭐하는 거야? 일방적으로 이러는 게 어디있어? 떠나더라도 우선 만나. 지금.”
“끊어. 취했어.”
여자는 전화를 끊고 문득 취기가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애처롭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고 있고, 방안에는 닉 드레이크가 흐르고 있다. 여자는 왠지 ‘우선 만나, 지금’ 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종3.
남자는 ‘음악의 숲’ 에 있었고 생각보다 취해있지 않았다. 홀에 들어서자 마침 우연처럼 닉 드레이크의 ‘way to blue’ 가 흘러나왔다. 만나자고 고집을 부리던 남자도, 걸려오는 전화를 끊던 여자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이네켄을 나눠 마시고 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여자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음악의 숲’ 을 나선 남자와 여자는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연인처럼 꼭 끌어안고 종3 길을 걸어갔다. 모텔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싸 안았다. 서로의 몸이 닿는 그 부분이 마치 몸 전체가 된 것처럼 두근거렸다. 남자는 어느 때 보다 더 여자의 깊이 들어가길 원하는 듯 움직였고 여자도 그런 남자의 가슴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은 온통 두 사람의 진한 숨소리로 가득 찼다.
‘타닥, 탁, 탁, 탁탁탁탁탁 쏴아-’
희미하게 바닥을 두들기던 빗소리가 점점 그 간격이 잦아 지는 듯 하더니 곧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꽁꽁 언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더욱 크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절정의 순간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빗소리였다. 남자와 여자는 포개었던 젖은 몸을 나란히 뉘였다.
“우리, 무슨 사이야?”
“….”
물음은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대기로 흩어졌다.
여자는 남자가 있는 공간을 빠져나와 아직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갔다. 골목길에는 술에 취한 두 사내가 휘청대는 시선으로 건물을 빠져나온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길가로 차분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에게 짧게 목적지를 말하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뒷좌석에 몸을 뉘였다. 여자는 왠지 모르게 미뤄왔던 할 일을 금방 해치운 사람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떠올리기에는 머리 한구석을 쪼는 듯 한 두통이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막상 떠오르는 생각을 막지도 않았다. 뒷좌석의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아직은 새벽보다 밤을 닮은 공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바람에 머리가 이리저리 날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여자는 여전히 침묵에 휩싸인 채였다. 열어둔 창의 작은 틈새로 차갑고도 투명한 십이월의 바람이 무엇엔가 홀린 듯 길 잃은 나비처럼 방안에 들어와 갇힌다. 침묵을 깨는 것은 다시금 시작된 그녀의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여자는 부지런히 그 날을 닦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