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리는 날.

먼지쌓인방 2008. 8. 15. 22:41 posted by yeena,
" 그 날,
  혼자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려고 극장에서 나왔는데.
  땅이 젖어있더라구... "
 
 
" 음, 그래서? "
 
 
" 음, 그래서
  '그제서야 아 비가 왔었구나. 여기 서울에.'하고 생각했어. "
 
 
" ... "
 
 
" 혼자 터벅터벅 젖은 땅을 걸어 되돌아오면서 생각했어.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론 서울의 일부지역에만 국한된 소나기 였을지 모르지만,
  하늘 아래 온 세상에, 비가 왔었구나.
  그리고 지금은 비가 그쳤구나. 하고말야. "
 
 
" 음, 그렇지.
  근데 그게 무슨뜻이야? "
 
 
" 그냥, 그 사람도 그랬던 것 같아서.
  우린 연애를 하자 한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또 연애인지 뭐였는지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과 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때에.
 
  ...마치 내리는 지도 그치는 지도 몰랐던 비 처럼.
  내 모든 곳에. 온 나에게. "
 
" 그날은 비가 아니라 너의 그사람, '네가 내리는 날' 이었군. "
 

다리 세개짜리 의자.

먼지쌓인방 2008. 7. 8. 21:35 posted by yeena,

마음 한 가운데에 의자를 끌어다 둔다.
의자에는 언제든 흔적 없이 떼어 낼 수 있는 노란 포스트잇이 한장 붙어있다.
포스트잇 위에는 몇번이고 고쳐 쓴 네 이름이 정성스레 쓰여있다.
그리고 그 의자를 너의 자리라고 부른다.

마음 속 한 구석을 '너를 위해 비워둔다.' 말한다.
늘 남의 얼굴에는 빈 자리를 비춰 보이고,
신촌역 3번출구 맥도날드 앞의 사람들 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간다.
그들을 흉내내어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양 시침에 시선을 드리운 채.

이미 의자위엔 뽀얗게 먼지가 쌓이어 가고
힘 없이 붙어있던 포스트 위의 네 이름도 오래된 글씨처럼 희미해져간다.

바닷속 깊은 곳 수 없이 많은 촉수를 드리운체 바닥을 기어 다니며
먹이를 찾는 한마리 탐욕스런 불가사리 처럼,
누군가라도 빈 자리를 채워 줄 사람을,
끊임없이 너 아닌 또 다른 타인을 찾아 헤맨다.

너2를 만난다.
가을 날 가지에 걸려있는 낙엽처럼 포스트잇따위는 떼어버리고
또 다른 너의 이름을 써 의자에 붙여둔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을 너2를 위해 비워둔다.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의자의 주인.
잊혀질 수 없이 많은 너 인데,
의자가 비어진 순간에 너를 오직 단 한사람인 척 군다.
네가 떠나면 수 없이 많은 잊혀진 너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천박한 창녀처럼,
이리 저리 마음을 섞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허비하는.
낡은 마음 속에 다리 세개 짜리 의자를
누가 볼까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소중한 보물인냥 품에 품고는 버리지 못한다.


그와 헤어진 뒤 알게 되었다.

먼지쌓인방 2008. 7. 5. 21:33 posted by yeena,

가, 내가 그의 셔츠 가슴팍에 눈물을 찍어내며

'예전의 그 사람이 그립다'고

울먹일 때 그가 말했다.


'예전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덮어 억지로 지우려 하지말라' 고.
나는 그의 품에서 밤 새 울었다.

나를 안았던 또 다른 남자를 잊으려고.

그리고 그와 헤어진 뒤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 억지로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밀어내는일이
아무런 가치 없는 행위였음을.
사랑에 대한 기억 각각은 편린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 거대하게 퇴적되어가고 있었음을 .

비오는 신촌을 걸었다.

먼지쌓인방 2008. 6. 29. 02:21 posted by yeena,

비오는 신촌을 걸었다.
우산 아래에서 네개의 발이 어색한 박자를 맞추는 것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하얀 운동화의 코끝처럼
마음이 계속 까맣게 젖어왔다.

이별을 실감하다.

먼지쌓인방 2008. 6. 22. 21:30 posted by yeena,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에도,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목소리로 걸려오는
당혹스런 전화가 없는 걸 보면.
내게 뒀던 가벼운 마음조차도 너는 이제 거둬 가버렸구나,
우린 정말 이별했구나.

하고, 나는 새삼 이별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