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였으면.

먼지쌓인방 2008. 11. 14. 02:34 posted by yeena,

저어기ㅡ,
저만큼 멀리 서서
손을 흔들며, 웃으며,
조금 상기된 얼굴로 달려오는 사람이.

너였으면.

하고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가벼이.

이터널 선샤인.

먼지쌓인방 2008. 10. 7. 00:00 posted by yeena,

1년 하고도 한달전 쯤 신촌역 3번 출구 앞.
붐비는 사람속에 그대가 서 있었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어깨에 맨 카메라가 꽤 산뜻했다.
우리가 어색하게 악수를 취하고 어깨를 부딪히며 걸었을 때,
그때,
오늘처럼 이렇게 그대가 그리울 줄 알았다면,
나는 그대를 모른척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청소하는 여자.

여자이야기 2008. 9. 6. 02:16 posted by yeena,

여자는 침묵에 휩쌓여있었다.
단지 그녀의 잦은 움직임만이 그녀 주변의 정체하고 있던 공기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여자는 끊임없이 방안을 닦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방안을 기고 있었다.
금방 닦아낸 바닥위로 떨어진 몇방울의 땀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오른팔이 그리는 부채꼴의 동선은 멈추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고 힘 없이 벽으로 몸을 기댔다.

그녀의 하얗고 동그란 이마는 스펀지처럼 땀으로 젖어 금방이라도 짜낸듯한 물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법 길고 하얀손에는 아직 딱지가 앉지 않은 크고 작은 몇개의 긁힌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있었고,
투명한 폴리쉬가 발린 손톱끝은 폐가의 기왓장 마냥 겹겹이 들고 일어나 있었으나,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듯 했다.

사실 여자는 몇일째 자지도, 먹지도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쳐 잠이 들 때까지
바닥을 닦고 청소를 하고 거울을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때로 멈추고 또 멍해졌다.

여자는 그 날을 떠올렸다.
여자의 팔은 기계적으로 바닥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그 날을 닦아내려는 듯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 날.
여자는 남자가 있는 공간을 빠져나와 아직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갔다.
골목길에는 술에 취한 듯한 두 사내가 서 건물을 빠져나온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길가로 차분히 걸어나갔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에게 짧게 목적지를 말하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뒷좌석에 몸을 뉘였다.
여자는 왠지 모르게 미뤄왔던 할 일을 금방 해치운 사람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떠올리기엔 머리 한구석을 쪼는듯한 두통이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막상 떠오르는 생각을 막지도 않았다.

뒷좌석의 조금 열린 창문틈으로 아직은 새벽보다 밤을 닮은 공기가 쏟아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바람에 머리가 이리저리 날리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마치 그 날이 가까운 과거 인것 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몇번이고 생각했다.
'아아, 눈을 감아 버릴껄. 그랬다면 다가오는 그의 눈동자를 진심이라 믿지 않았을 것을.'
이것은 차라리 탄식에 가깝기도 하고 절규에 가깝기도 했다.

여자는 여전히 침묵에 휩쌓여있었다.
열어둔 창의 작은 틈새로 차갑고도 투명한 시월의 바람이 
무엇엔가 홀린듯 길 잃은 나비처럼  방안에 들어와 갇힌다. 

침묵을 깨는것은 다시금 시작된 그녀의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여자는 부지런히 그 날을 닦아내고 있었다.

용문사.

먼지쌓인방 2008. 9. 3. 17:01 posted by yeena,

집에서 마포역로 향하는 길은 내내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쓰고 있다.
무심하게 고개를 살짝들어 설익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매가 맺혀 힘겨운 듯 축 늘어진 가지를 보고 있자니
용문사에 다시 가고 싶어진다.
용문사의 열 아름은 족히 되어 보이던 그 은행나무에도 은행이 열렸을까.
천년도 넘게 살았다는 그 고목 앞에서, 결실의 여부를 두고 그와 했던 내기를 떠올린다.
열매따위 맺히지 않아 당신이 이겨도 좋으니, 우리 다시 그곳에 함께 가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남자의 여자를 만난 여자.

여자이야기 2008. 8. 18. 22:42 posted by yeena,
S역,조금일찍퇴근해서돌아오는길.
S역에서여자는어제와같이환승을한다.
S역의환승로는다른역에비해서는조금긴편이지만조금한산한편이다.

아마도4시가가까워오는이시간은
대학생이나장바구니를든아줌마,보통의직장인외의사람들이대부분이다.
여자는몸이조금아프다는핑계를대고일찍퇴근했다.
하고있던일도마무리지었고,마감도끝난상태라
근래에멍해있는여자의모습을보더니팀장은흔쾌히
'응,그래일찍퇴근해서,좀쉬어요.'라고친절하게허락해주었다.

그래,휴식이필요하다.
여자는몇일전헤어졌다.
'그남자와나사이에는시작도없었으니,끝도없는것이당연한것인지도모르겠지만.'이라고
그녀는생각하고있었다.

몇달전여자는,애인과헤어지려는시기에있는남자를만났고,
여자역시몇년간사귀어오던애인과헤어진지서너달정도지나있었다.
여자는평소에그남자에대해호감이있었던터라불쑥약속을잡는그남자가싫지않았다.
그리고적절한타이밍에적절한만남이라고생각하며두어달그를만나오고있었다.
한동안퇴근을하고나서누군가와만날약속이있다는사실에심리적으로큰만족을느끼고있었고,
그와만나는동안은옛날사람에대한그리움을떠올릴여유가없었고,
탐스러운굵직한목소리의가수가노래했듯이,'사랑은다른사랑으로잊혀진다.'는생각을했다.

그런데몇주전부터
그의연락이뜸해졌고마침내그는전화를피하기시작했다.
그리고몇일전그가전화기를통해조금은미안하다는듯이
'우리,아무것도아니잖아.나새로만나는사람생겼어.연락안했으면해.'라고말했다.

여자는아무렇지않다.고생각했다.
지인들이평소의그녀를평가하듯'냉정하고도침착'하게,
즉,그녀답게'그래,그럼.'하고말했다.

전화기를귀에서떼어내려놓는순간
그녀는얼굴에서뭔가찌릿찌릿한느낌을느꼈다.
눈꺼풀이파르르떨리고맥이빨라진것같은느낌에불안함을느꼈다.
몇일간의과로탓이라고생각해비타민몇알을줏어먹고는잠자리에들었다.

덮어쓴이불속에서결코그녀는그와의일때문이라고생각하지않았다.
왜냐면그의말처럼그와그녀는'아무사이'도아니었기때문이다.
연애를시작한적도없으니,그연애의끝도없다고생각했다.

그리고몇일후그녀는가슴이뻐근함을느꼈다.
숨을크게쉬려고하면가슴께에생선의가시가걸린듯따끔거려오기도했다.
주변의충고에따라병원에도가보았으나,외적으로보여지는원인은없고,
아마도'신경성'일것이라고말하고그저'잘먹고,잘쉬고,잘자라.'고만했다.
신경안정제와수면유도제를처방받았다.
과거의가벼운증상과달리조금힘들다고느꼈지만,별것아니라고생각하고있었다.

여자는S역의터널같은환승로를걷고있었다.
S역의환승로의끝에는제법긴에스컬레이터가있었다.
평소라면에스컬레이터에서도걸어오르내리는그녀였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는순간왼쪽어깨에매고있던가방이흘러내려.
가방을고쳐매려고잠시서있을때였다.

너무나도낯익은얼굴이반대편에서그녀를향해올라오고있었다.

올려묶은길지않은갈색머리.
약간촌스러워보일수있는핑크색이잘어울리는하얀피부.
동그란갈색의큰눈,커다란귀걸이와연한청색의미니스커트차림의여자.

같은여자가봐도예뻐서였을까?낯익다는느낌에
머릿속에서다가오는얼굴이누구인지애써떠올려보지만
도저히누군지생각이나지않았다.
인쇄업체의직원이었나?새로계약한광고사의직원은아니었는데,
대학동기치고는좀어려보이는외모야,아,자주가는동네커피전문점의알바생었던가?
학교후배는아닌것같고,도대체누구였지?하고머리를아무리짜내어봐도그녀의정체를알수없었다.

올라오던그녀와내려오던여자가바로옆에서스쳐지날때까지
그녀가머릿속의수없이많은얼굴들을CSI몽타쥬작성장면처럼뒤적거리고있을때,
눈이마주친순간그녀의웃는얼굴을보고여자는알게되었다.

그녀는,남자의여자였다.
남자의집에서얼핏그녀의사진을본적이있었다,아무생각없이.
여자는지나간그녀의뒷모습을살짝돌아보고는그사진을떠올렸다.
그의그녀가그의목을감고입을벌려신나게웃고있고남자는목이졸리는지조금찡그린표정이었지만,즐거워보였다.
그녀는그사진을보고꽤나잘찍은사진이라생각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내리는순간동안여자는생각했다.
'그와2년을넘게사랑한그녀도그와헤어진후에저렇게밝고아름답게잘살고있는데,
나는무엇일까,왜나도모르는사이에이렇게아픔을극대화시키려고하는걸까.
나는이런아픔의감정을즐기고있는지도모른다,하지만여기까지만.'이라고생각했다.

그의그녀를만난이후,그녀는몸이조금가벼워졌음을느꼈다.
집에도착하자마자하이힐을벗어놓고는맛있는저녁을만들어먹어야겠다고생각했다.
오랜만에야끼소바를만들었다.맛은스스로꽤만족스러울정도였다.
한동안몸이안좋다고생각되어멀리했던맥주도한캔꺼냈다.
맥주와함께야끼소바를거의다먹어갈때쯤에
그녀는가슴께에걸리던느낌이사라진것을알게되었다.
그리고여자는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