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잠버릇.

먼지쌓인방 2008. 12. 27. 04:00 posted by yeena,


언젠가 잠든 그를 생각없이 바라보다
그의 꽉 움켜쥔 손을 본 적이 있다.
몇번이고 아무것도 쥔 것이 없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고 잠이 들었지만,
겨울과 봄의 경계 그 어디쯤 멈추어 있을
우리의 마지막 어떤 날 에도 그는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곱씹고 또 곱씹어 너덜대는 그 날.
긴장 가득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물겹다.

불구.

먼지쌓인방 2008. 12. 14. 12:06 posted by yeena,

불구처럼 망가져버린
우리의 관계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멍청하게 서 있다.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먼지쌓인방 2008. 12. 8. 00:30 posted by yeena,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온 세상 모든 고양이가
아이스크림이 되겠네.

중구예찬

먼지쌓인방 2008. 12. 6. 22:30 posted by yeena,

중구는 나에게 별천지이다.

나는 중구가 서울에서 제일 재밌는 동네라고 생각한다.

'중구'라 함은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 범위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 넓은 중구중에 내가 좋아하는 곳은

263번 버스가 가로질러가는 중구의 아주 일부분이라 해야할 것이다.

 

나는 중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아본적도 없다.

그런데 중구에 위치하고 있는 263번 정류장은 거의 모두 마음에 든다.

특히 퇴계로나 남대문 시장같은 곳을 지날때면 

나는 버스창에 바싹 달라붙어서 바깥의 세상에 둔 시선을 거둘줄 모른다.

도꾜의 오모떼산도같이 한산함이나 산뜻한 맛은 없지만

길에 주욱 늘어선 노점들과 노점의 알록달록한 과일들,

골목골목으로 이어진 시장과 사람들,

길 양쪽으로 쭈욱 늘어선 애견센터,

그 유리가게 안에 꼬물대고 있는 작은 강아지,

완구점 모형 장난감 처럼 차곡차곡 늘어서 번쩍거리고 있는 오토바이들,

캔커피와 담배를 양손에 들고 번갈아 마시는 사람,

영화관앞의 연인들과 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베스파를 탄 남자,

왠지 한남동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갤러리와 스튜디오들.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낸 혼잡함으로 채워지는 공간.

조밀하게 채워진 그 다양함의 공간과 아주 작은 틈새의 여백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전같음 뭔가 허접스럽다 느꼈을 풍경인데도,

버스창의 프레임안에 담아보는 시선이 애정어리다.

흑과 백의 여자.

여자이야기 2008. 11. 22. 03:32 posted by yeena,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아마도 여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여름의 한 가운데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
날씨를 묘사하는데 '끔찍 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그 해 여름은 정말 끔찍했다.
연일 뉴스에서는 지구 온난화니 이상기후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 댔고,
기온은 40도 가까이 치솟으며 기록행진을 했다.

나는 그 해의 더위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이상하리만큼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은 머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담은
거의 본능적인 것 이었다.

그 여자와 마주쳤던 그 날도 무척이나 무더웠다.
나는 녹아내릴 듯한 아스팔트 위를 사막의 도마뱀처럼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무더위에 지쳐 은행나무 그늘을 찾아 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몸이 온통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의 끝에 다다르자 숨이 턱까지 차올라 곧이라도 터져나올 듯 했다.
나는 아스팔트에 말라붙은 동물의 사체처럼 언덕의 꼭대기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때 내리막길 끝에서 아주 일정한 속도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것이, 수면위를 움직이는 소금쟁이 처럼 걸어오는 여자와의 첫 조우였다.

여자는 꼭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녹일듯한 기세의 날씨와는
아무 상관 없는, 조금은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면서도 여자는 전혀 숨 차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녀의 색상이었다.
그녀는 온통 흑과 백으로만 배색되어 있었다.

이 뜨거운 태양광을 모두 끌어들여 타버리려는 듯이
새카만 긴 생머리가 어깨길이만큼 내려와 있고,
머리색과 맞춘듯한 검은 눈썹, 눈동자,
그리고 속이 비치는 하얀 니트 상의에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까만 바지.
하얀 슬리퍼, 그리고 까만 발톱, 까만 가방, 하얀 목덜미.
여자는 세상의 색을 모두 모르는 듯 해보였다.
여자가 있는 풍경은 참으로 묘해 이상스러워 보이기 까지했다.
여자의 자취를 따라 풍경은 흑백영화처럼 색을 잃어갔다.
나는 여자가 세상의 색을 훔치는 악당 마녀가 아닐까 생각했다.
으레 어릴적 봤던 영화 속에서 악인이나 마녀는 검은 옷을 입고 났었다.
잠시동안 정말 그녀가 마녀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진지해져버려 웃음이 나왔다.

흑과 백으로 무장한 여자가 나와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어느 순간이었다.
그 여자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 오는 순간에도 나는 여자의 머리를 보며 
언젠가 티비에서 보던 대장간의 풍경을 떠올렸다.
검붉게 달아오른 쇳덩이 같은 것.
곧 이라도 망치로 내려치면 이그러져버릴 쇳덩이 같은 것.
여자의 까만머리가 쇳덩이처럼 붉게 달아오르진 않을까,
혹은 어렸을적 가지고 놀았던 돋보기 안경아래 검은 색종이나 개미처럼
치이이익 연기를 내고 재가 되어 없어지진 않을까.

그녀에 대한 사소한 의문은 
이제 '그녀가 계속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