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이사가 된다면.

먼지쌓인방 2009. 3. 8. 03:30 posted by yeena,

얼마후의 이사를 위해, 이삿짐을 싸고 있다.
벌써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이사를 다녀봤지만,
이사를 하는 일은 매번 커다란 스트레스가 된다. 

제 자리를 정해둔 물건들을 방안에 쏟아놓고서 짐을 꾸려본다.
나는 손때묻은 물건을 두고 갈등한다.
쓰레기봉투와 박스를 번갈아 바라보지만 무엇 하나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익숙한 것에 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가장자리가 낡은 일기장 한권,
손길이 닿았던 낡은 물건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해
버거운 추억도 이고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만 간다.

물론 이사가 좋은 점도 있다.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는,
방의 가구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갑갑함이나 지루함을 해소하는,
기능도 분명 있지만, 떠나고 싶었건 떠나고 싶지 않았건 이사 자체에는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기분 좋은 떨림도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믿는 나로서는 더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

눈뜨면 낯선 방, 낯선 방안의 물건 배치, 낯선 집, 낯선 동네,
모든 것에 익숙해지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리게 될까.
시간은 애쓰지 않아도 잘만 흘러갈텐데 이게 다 무슨 걱정이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나는 너무도 작은 마음을 가진걸까. 

나의 짐 정리는 항상 사람에게서 머뭇거린다.
사진도, 선물도, 네가 닦던 모가 휜 칫솔 하나, 작은 플라스틱 태그하나,
네게 주려던 것들은 모두 쓸어 담아 버리고,
너의 기억이 서린, 네 손길이 닿았던 내 방과 너와 함께했던 우리 동네는 남겨두고 떠나고,
이렇게 하면 모든 정리가 끝나는 걸까.
정리도 참 쉽구나.

이렇게 마지막으로 박스안에 나를 뉘이고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로 박스를 봉하고 나면,
나는 낯선 공간으로 배달되어져
낯선 사람들과 낯선 기억을 만들며 살아가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망설이지만
대답할 수 있을것 같다.
나는 그럴 수 있을것 같다.

마음도 이사가 된다면.
내 마음도 이사가 된다면.
텅 비워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욕조 속의 여자.

여자이야기 2009. 1. 22. 23:13 posted by yeena,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알람은 14분 정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벌써 30분째 침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주중의 아침은 누군가 짜놓은 음모처럼 매일이 똑같았다.
여자는 억지로 침대에 붙은 몸을 떼어내어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와 무릎이 툭 튀어나온 바지와 속옷을 벗어
걸어나온 자취위에 차례로 흩어 두었다.
바싹 마른 욕실 바닥에 뼈와 핏줄이 선명한 발등 두개가 내려섰다.
노란 조명아래서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번들거리는 코와 푸석한 볼을 한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가 서있다.
헝클어진 것은 여자의 머리가 아니라 여자 그 자체 처럼 보였다.
타인의 것처럼 느껴지는 광대 언저리에 손바닥을 얹고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침마다 여자는 후회했다. 
그녀는 아침이 시작되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Close.

먼지쌓인방 2009. 1. 17. 02:29 posted by yeena,


이제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을 닫습니다.
오늘을 끝으로 당신을 향한 나의 따뜻함은 없습니다.

잊을겁니다.
이제껏 잊혀지는 기억은 없다 믿었지만 아닐겁니다.
티끌하나 남기지 않고 지울겁니다.
문득 떠오른 당신의 기억에도 따뜻하게 추억하는 일은 없을겁니다.
차갑게 뿌리치고 돌아설겁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나를 안은 당신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내게 입맞춘 당신을 혐오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온기를 전한 당신이 
영원히, 아주 오래도록 불행하길 바랍니다.

이 모두,
당신을 탓할 겁니다.
당신을 원망할 겁니다.

이렇게도 못나 당신 마음에 들지 못한 내 탓만을 하지는 않을겁니다.



에쿠니.

먼지쌓인방 2009. 1. 15. 00:00 posted by yeena,

네가,
"에쿠니는 이제 싫어." 라고 이야기 했을 때.

나는 가슴이 아팠어.

너와 나의 공통점이 하나 없어져서가 아니라
언젠가 네가 나에게
"역시, 나의 에쿠니."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야.

폐업.

먼지쌓인방 2009. 1. 14. 18:01 posted by yeena,

자주 가던 그 가게가 폐업을 했어.
사실 그렇게 자주 갔던건 아니었지.
자주 가기엔 좀 멀었어.
회사와 집 그 어디와도 가깝지 않았거든.

난 그 가게를 좋아했어.
1년에 고작 몇 번이었지만 퇴근길 어떤 날에 문득 그 집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런데,
몇일 전 그 집을 찾아 갔을 때.
문 앞에 붙어있는 손바닥 만한 쪽지에 적힌

' 개인적인 사정으로 폐업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

라고 쓴 글씨가 얼룩 덜룩 빗물 자국 모양으로 꽤 번져 있는 걸로 봐서.
비가 왔던 지난달 언제쯤, 혹은 그 전 쯤 문을 닫았겠거니 잠시 생각할 수 있었어.

그 집 말야. 썩 맛이 괜찮았어.
주인이 곧 잘 흥분을 하는지, 때론 좀 짜기도 했지만 말야.

난 그 집이 괜찮았다고. 

여자 주인은 말이 없는 편이었지.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젖은 손으로 내어놓는 식사는 표현하지 않는, 내면화된 친절이 묻어있었달까.
뭐 그런건 설명하긴 어려워. 그냥 느낌이지.

몇개 안되는 메뉴중에 하나를 골라 주문해두고 기다릴 때
내가 앉은 자리의 반대편에 주방이 있었는데.
요리하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는 자리였어.
여자는 냄비에 물을 데우며 노래를 흥얼거렸어.
그것은 때로는 끊일 듯 끊이지 않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음의 전개였지만. 그게 거슬리지 않았단 말이지.
아니, 나는 그 흥얼거림을 좋아했어. 그랬던 것 같아.
언젠가 나 역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흥얼거린 적이 있었거든.

닫혀진 문 앞에서 또 한번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어.
이내 발걸음을 돌려 골목을 걸어나왔지.
모퉁이를 돌아 큰 길가로 나왔을 때
조금 서글픈 마음이었어.

마치 세상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사람마냥
나는 떠돌았지.

그리고
곧 다른 가게로 들어갔어.
그런데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쪽지의 마지막 말이 말야,
'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
죄송하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어색해 마음에 자꾸 걸렸어.